③ 지금의 시흥대로는 정조대왕 때 만들어졌다.

기사입력 2011.12.05 23:12 조회수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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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림동 강남성심병원에서 금천구 시흥동 시계에 이르는 가로로 길이 6.8㎞, 너비 50m이다. 왕복 10차선 간선도로로서 차량 통행이 많다. 서울에서 안양 수원 오산 등의 수도권 남부지역으로 길이 이어지는 사통팔달한 도로이다.

정조대왕은 1789년, 아버지 무덤을 현륭원(화성시 안녕동 위치)으로 옮긴 뒤 매년 능을 참배키 위해 많은 능행을 하게 된다. 정조대왕은 능행차에 어떤 길을 택했을까?  원래 정조대왕은 지금의 남태령을 넘어 과천과 인덕원을 거쳐 가는 길을 선택했었다. 그러나 높은 고개를 지나야 했고, 많은 교량을 지나가야만 했다. 정조대왕뿐만 아니라 수행했던 관리들도 힘들어서 지치기 일수였다. 지금의 남태령 고개를 보라. 차량통행 아니면 누가 그 길로 통행하겠는가? 남태령 고개는 지금이나 예전이나 오르기 힘든 고개였을 것이다.


당시의 '원행정례'에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능행길은 서울에서 화성까지 거리는 85리이며, 교량의 수는 21개이다. 정조대왕은 능행길을 수정하기로 결심한다. 야사에는 정조대왕이 능행길 노선을 수정한 계기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능행길은 노량의 배다리(주교)를 지나 용양봉저정, 만안고개, 금불암, 금불고개, 사당리, 남태령, 과천행궁, 찬우물점, 인덕원천교, 갈산점, 원동점, 사근평행궁, 지지대고개를 거쳐 수원화성으로 들어오는데, 찬우물점 근처에는 김약로의 무덤이 있었다. 김약로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으뜸 선봉에 섰던 사람인 김상로의 형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기에 정조대왕은 이 무덤을 피해 노선을 바꾸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 융릉으로 들어가는 홍살문 주변으로 안개가 가득하다. ⓒ 경기문화예술신문

어쨌든 정조대왕은 신작로(지금의 시흥대로)를 건설하게 이르렀다. 초기 능행길 보다 비교적 언덕이 적고 공사의 기간도 단축되었다. 새로운 능행길 노선의 총 책임자를 경기감사 서용보를 임명하고 토지수용비 및 노동임금도 철저하게 지불해 주었다. 건설비용의 예산은 평안도 남당성 축성공사비로 남은 돈 1만 3천냥을 쓰게 했다. 드디어 1794년에 신작로를 완성하게 된다. 새로운 능행길의 노선이 확 바뀌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된 이 길의 거리는 83리, 환산하면 44.82km정도된다. 거리는 줄었지만 교량의 수는 조금 많아졌다. 총 24개의 다리가 놓여진다. 지금의 안양시 만안교, 만안제 등이 당시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오늘날의 시흥대로는 탄생하게 되었다. 능행길은 1천 7백여 명의 인원이 동원될 만큼 길은 넓어야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길은 조금씩 확장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연로의 너비가 대략 24척(10m)이라고 전해진다.
[오창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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