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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1월 1일부터 6일까지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위치한 갤러리 민정에서 <어느날, 메시지 Ⅲ> 송정임, 채선미, 이주희, 하소영, 연규혜 5인전이 개최된다.
세컨 블룸(second bloom): 다시 출발점으로 회귀하며
<어느날, 메시지>III는 하소영, 채선미, 이주희, 연규혜, 송정임 다섯 작가의 세 번째 그룹 전시이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꿋꿋이 정진하는 친구들의 작업에 대해 나는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오래 생각하다 “어둠에서 벗어나기”라는 화두와 “어여쁜”이라는 형용사가 떠올랐다. 그림 이상으로 그자신들이 “어여쁜” 작가들이다.
오십대에 접어들었지만 엄마로서의 삶은 오래도록 이들의 손과 발을 꽁꽁 묶어놓았고, 때문에 중견이라기보다는 초심자인, 여전히 소녀같은 어여쁜 친구들이다. 이들의 스타일은 모두 다르고 쉽게 하나로 묶을 수 없다. “내가 내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라는 전시의 표제를 제외하면. 이번 전시의 주제를 “세컨 블룸(second bloom)”으로 하면 어떨까 했던 것은 나의 제안이었는데, 미술사와 함께 오랫동안 정신분석학 공부를 해오며 분석의 끝에 주체는 최초 출발 지점에 다시 서게 된 자신을 발견한다..는 나자신 절실했던 경험의 진정성으로부터였다.
이런 생각은 기획이라 할 수는 없는 그저 하나의 제안이었을 뿐이다. 미술사와 함께 정신분석학을 꽤 오래 병행해 공부해온 나로서는 그저 묵묵히 듣기만 하는 분석가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취지에 공감했지만, 그러나 작업된 결과들은 “세컨 블룸”의 피어나는 꽃같은 이미지라기보다는 “어두운 전조”라 여겨진다. 어두운 전조는 프루스트가 기술한 마들렌의 경험에 해당하는 것으로, 각자에게 다르게 나타난다. 나 개인적으로는 음악의 악곡 가운데 분위기나 정서의 이행이 표현되는 조바꿈의 순간, 오후가 지나 하루 해가 저물어갈 무렵 공기의 습도가 높아지면서 음향들이 좀더 선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는 순간, 대기에 잉크 한방울을 탄듯 푸르러질 때 살짝 어두워지는 순간에 해당한다. “예기된 미래”로서 오래 간직했던 이런 변이의 순간들은 지속의 흐름을 주시하고 놓지 않을 때만 의미가 있는 것들이며, 그 문맥과 변화를 절단해 조각조각 파편화된 이미지로 다가온다면 좀처럼 읽을 수 없는, 타자에게는 의미가 없거나, 없어 보이는 기억의 편린들이기도 하다.
하소영은 한동안 텍스처를 지닌 레이스와 직물 그리고 정교하고 섬세한 꽃병에 꽂힌 꽃을 그려왔다. 선묘의 정교한 테크닉이 돋보이는 작업을 해오다가 “아름다운 화실”과 결부된 그의 일상(그는 부부화가로서 가끔 부부 함께 <화양연화>展을 한다), 지금 여기를 충실히 살아가는 와중 문득문득 감지되고 생각하게 되는 “너머(beyond)”, “다른 곳(elsewhere)”의 문제에 천착해왔다. 그 다른 곳은 몬스테라 같은 실내 관엽 식물의 모습이라거나 열대 풍경과 같은 이국적 요소로 표상되었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다시 정물적 구성이 돋보이는 작업을 했다.
채선미의 추상 작업은 도무지 어쩔 수 없는 벽에 맞부딛친, “온 세상이 다 까맣”게 경험되는 오랜 어둠으로부터 나온 빛의 경험의 기록이다. 그것은 작업을 하지 못했던 오랜 시간보다는 그 속박이 약간 느슨해졌을 때 감지되던 현실의 무게이다. 색채로 표현되는 빛은 그에게는 우리가 빛 하면 떠올리는 눈부심과 찬연함이라기보다는, 어둠과 빛은 항상 같이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이주희는 최근 돌을 그리기 시작했다. 드로잉으로 마음을 그리던 그의 화풍이 변한 것은 90세에 접어들고 눈이 보이지 않은지 7년째 접어드는 아픈 엄마로부터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돌을 그리기 전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쉬이 사물에 의탁해서 환유적으로 표상할 수가 없었다. 혼자 있을 때면 그를 짓누르는 무게로 느껴지는 임박한 엄마의 죽음은 돌이라는 사물의 존재로밖에 표상되지 못하는 무엇이다.
연규혜는 우연히 마주쳤던 타인들중 그가 어떤 독특함을 포착한 사람들을 사실적으로 그린다. 주로 노인들, 할머니들이다. 그들은 매우 약한 존재감을 지닌, 현실에서 비체(abject)화되는 존재들이지만 그에겐 모두 “마더(mother)”이다. 그 노인들 중에는 눈물을 훔치는 위안부 할머니도 있고 윤여정, 긴즈버그 대법관 같은 톱스타나 LA에서 마주쳤던 마치 배우같은 패셔너블한 할머니도 있다. 혹은 근대사에서 튀어나온듯한 중년 남성이라거나 연륜이 깊어 보이는 서양인 할아버지의 모습도 있는데, 할머니들 못지 않게 그들 모두 “마더”이다. 노인만 그리는 것은 아니다. 그가 모델로 택한 타인들 중에는 아이와 함께 겨울 코트를 걸치고 환한 미소로 쌍둥이 유모차를 끄는 젊은 엄마도 보인다. 그러나 작가는 따스한 시선으로 그들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가난하고 무기력하고 쓸모없다고 치부될 수 있는 노인들이지만, 연규혜는 그들 자체 안에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독특성을 감지하며, 무엇을 굳이 하지 않아도 그냥 그 존재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
송정임은 최근 낙엽의 그림자에 꽂혀 있다. 처음 내러티브를 지니고 초현실적이기도 했던 그의 시리즈적 그림들은 그림자를 지닌 낙엽이라는 하나의 소재, 그림자가 마치 그자체 살아나(animated) 움직이려 하는 것을 불안스레 주시하는 시선들의 집적으로 압축되었다. 그림자는 파리나 사마귀 같은 위협적인 곤충의 모습이 되었다가 플라밍고나 유니콘 같은 환상 동물의 모습으로 탈바꿈하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불안으로 다가온다.
정신분석 이론가 볼라스(Christopher Bollas)의 말로는 “대상의 그림자(The Shadow of the Object)”에 해당하는 모든 정동들은 우리가 겪어온 각자의 생의 무게와 어둠에 기인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공부해 온 미술사의 현란한 그 어떤 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래서 무의미할 수 있는. 그러나 여성의 존재와 발화는 그 어떤 의미와 기표의 질서도 벗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지극히 물리적인 현실적인 무게, 고통, 어려움을 감당해온 이들 모두에게 작업이란 여유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좀처럼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자신의 이름으로는 설 자리가 없는 상징계(the Symbolic)로부터 조용히 물러나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의 소중함을 보듬는 실천이다.
사소하고 작은 목소리들일 뿐이지만 다섯 작가들은 프루스트의 마들렌이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던 과거의 콩브레를 기억 속에 현재로 소환하듯 우리들 모두가 충분히 살아내지 못했던 한국 근대와 모더니즘의 긍정적 기운을 동시대적 현재에 다시 불러낸다. 세컨 블룸, 두 번째 시작인 출발을 주제로 하는 데는 모두 공감했지만 이들은 꽃을 그리지 않았다(하소영 작가를 제외하면). 그러나 꽃들에 비유한다면 작가들이 그린 꽃은 어떤 꽃일까? 볼라스의 말마따나 주체를 덮치고 사로잡아 잠식하는 상실한 혹은 상실이 예감되는 대상들의 어두운 그림자로 이뤄진 꽃, 보르헤스가 언급했던 흩어지는 빛바랜 모래 빛깔의 꽃일 것이다. 그 희미한 꽃들에 나는 초록 박공집의 앤의 말, “미나리아재비는 마치 햇빛으로 이뤄진 것 같아요.” 젊은 날의 햇빛 한 조각으로 이뤄진 꽃을 더하고 싶구나.
- 최정은 한국외국어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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