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을 지나 춘분이 되면 밤보다 낮의 길이가 길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도시에서 밤은 도무지 잠들지 않는 낮의 속성을 지니고 있어 낮과 밤은 하루를 가르는 시간적 개념에 국한된다. 정적 속에 고요한 어둠이 있는 본래적 의미의 밤을 느낄 수 있는 헤이리에서 금산 갤러리는 「밤의 너비 The Width of the Night」 라는 제목의 전시를 기획하였다. 전시는 강민수, 박형근, 이만나, 정지현의 회화, 사진, 설치 작품들을 통해 해질 무렵부터 동트기 전까지라는 시간적 의미의 밤과 물리적인 어둠의 장으로서의 밤이 내포하는 여러 특질들과 의미론적 층위들을 탐색한다.
언어의 침묵으로 정적 속에 잠긴 밤, 태양의 온기를 잃어가며 낮과는 다른 공기에 둘러싸인 밤은 새로운 감각들을 일깨운다. 모든 사물들이 세부를 잃은 채 어스름한 덩어리들로 다가오며 밤은 전제의식을 버리고 사물과 직접 맞닥뜨려 경험하게 되는 실제적 감각에 주목하게 한다. 녹음이 우거지다 못해 빛을 삼키고 있는 듯한 박형근의 짙은 청록빛 숲 속에서 사물 하나하나를 새기는 대상화된 시선보다 축축한 감촉의 공기, 윙윙거리는 듯한 소리가 더 압도적으로 느껴진다. 실제로 한때 주로 밤풍경을 찾아 다녔던 이만나는 낮과는 다른 사물을 만나게 하는 밤의 어둠에 매혹되었던 것 같다. 낯선 온도와 무게의 사물이 표현된 그의 그림에는 해가 지고 밤의 영역으로 진입하며 모든 것이 모호하고 오묘한 기운을 띠는 시간 그가 사물과 새롭게 마주한 순간이 응결되어 있다.
박형근과 이만나의 작품이 세계와의 현상학적 만남을 극대화하는 어두운 밤의 물리적 특질과 맞닿아 있다면 강민수와 정지현은 어둠 가운데 때로 고독한 불빛들을 내포하며 몽상을 불러일으키는 밤의 산물과도 같은 작품들을 보여준다. 잠재된 기억 속의 시공간이 일어나고 현재와 과거가 뒤섞이는 느린 밤의 몽상처럼 강민수의 그림은 목가적인 상상의 풍경 속에 유년기 시절을 떠올리는 아이들의 형상을 그려내며 현실과 기억, 상상 사이를 잇는 접점을 파고든다. 버려진 일상사물들을 조합하고 그 안에 낡고 기이한 움직임을 부여하여 사물의 시 같은 느낌을 주는 정지현의 오브제들은 시적이고 사적인 동시에 개인과 사회, 일상과 구조 등의 거시적인 물음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깊고 넓게 움직이는 밤시간 사고와 몽상의 스펙트럼을 닮아있다.
이와 같이 밤은 단순히 어두운 환경을 동반한 시간의 한 범주로 제한할 수 없는 미학적, 철학적 깊이를 지니고 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자전으로 지구의 반은 12시간 동안 밤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러나 밤의 너비는 태양의 반대편 지구에 물리적으로 국한되지 않고 전 우주로 또는 눈을 감는 순간 눈 뒤로 무한히 확장되는 인간의 내면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밤의 요소들을 지니고 있는 작품들로 ‘밤의 너비’전은 우리 눈앞에 지시적으로 읽어낼 수 없는 밤의 확장적 의미와 심상들을 탐색한다. 그리하여 밤은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수평의 너비로 의식과 감각, 소통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잠재력의 장으로 새롭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는 오는 4월 1일까지 금산 갤러리 헤이리에서 전시되고 있다.
문의 : 031-957-6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