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영원(呂榮元) 1595(선조28)~1627(인조05)
경기도 양주시 봉양동 881번지에 충신정려문이 있다. 조선중기의 충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字)는 화백(華伯) 이다. 1595년(선조28년)에 태어난 여영원은 어려서부터 무예가 출중하고 지략이 뛰어나 1617년(광해군9년)무과에 합격, 선전관(宣傳官) 훈련원(訓練院) 주부(主簿) 경력(經歷) 부정(副正)등을 역임 하였으며, 1626년(인조4년) 중국의 명나라를 누르고 일어선 후금의 누루하치가 조선을 침략코자 함에 조정에서 남이흥을 원수로 구성(龜成)에 진을 치고 압록강 요충지인 벽동(碧潼)을 지키기 위하여 여영원을 군수 겸 벽동진 병마절제사로 하여 그 임무를 맡게 하였다.
1627년(인조5년) 1월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수많은 호적을 만나 고전분투 하다가 결국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1월14일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결하였다.
나라에서는 이 충정심을 기리기 위하여 1745년(영조21년) 정려의 법에 의거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증직하고 정려문(旌閭門병)을 내려 세우게 하였다.
이후 1796년(정조20년)에는 갑옷을 입고 수고롭게 싸웠다는 뜻의 양(讓)과 아무도 없는 쓸쓸한 들판에서 홀로 죽었다는 뜻의 장(壯)자를 합하여 양장(讓壯)이라는 시호를 내리게 되었다.
당시의 충신 정려문은 1950년 6.25 전란으로 소실되어 그후 후손들이 1992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